생몰(生沒) 년대가 확실치 않으나 조선조 초기 세종조의 인물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고려 공민왕대의 문신 경(卿)의 8세손으로 알려져 있다.
卿의 이력과 공적은 따로 알아 볼 수 있고, 송도선생은 당시 忠, 孝, 烈,을 강조하는 삼강윤리가 사회교화 정신이 된 시대에 생원(生員)의 신분으로 학문과 행실, 특히 효행이 뛰어났다.
부친이 사물을 볼 수 없는 소경이 되는 병에 임하였으나 송도가 과거에 합격하여 돌아오니 갑자기 눈을 뜨게 되었다.
모친이 병이 들어 생선회를 먹고 싶었으나 가난으로 봉양키 어려워서 겨울의 연못에 나가 얼음을 두드리니 붕어가 얼음 위로 올라 왔다 하며, 제사에 임하여 제수(祭需)를 구하려니 산꿩이 날아들었다 하였다.
이는 비과학적인 이야기지만 그의 효행을 하늘이 알았다는 당시의 사회적 인식에 의해 세종 10년 예조(禮曹)가 찾아가 확인하고 그의 효행을 기록한 旌閭碑와 旌閭閣을 하사하여 지금 우정동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석에는 孝子成均生員宋滔之閣이라 새겨져 있다. 이 외에도 그의 효도를 말하는 백련암의 전설같은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모두 당시 지향하던 性理學的 文風과 효행의 정신으로 도덕적 규범을 세우고자 하는 사회적 풍토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 될 것이다.
효는 한국인의 근본적인 정신의 토양이 되어왔음에도 오늘날 효의 사상은 점차 흐려져 가고 있지 않나 하는 사회적 인식을 새로이 하는 데에는 송도의 효 정신이 중요한 우리의 정신 문화 유산으로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1884년 12월 6일 북구 농소면 송정리에서 출생, 승지 박시규와 여강이씨의 장남으로 출생, 생후 100여일 만에 백부의 양자로 입적, 1898년 15세에 월성최씨, 鉉敎의 장녀와 혼인,
16세에 왕산 허위(애국계몽사상가)의 문하에서 정치와 병학을 수학, 1905년 양정의숙 입학, 법률과 경제학 습득, 의병장 신돌석과 의형제 결의,
‘을사늑약’후 경북 평해에서 항일 의병운동, 김좌진과 의형제 결의, 1910년 판사시험 합격, 평양지원에 발령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만주, 연해주, 상해등지로 여행 후, 자신의 전답을 잡혀, 김기덕, 오혁태와 함께 대구에서 ‘상덕태상회’라는 곡물상회를 설립 자금을 조달, 국권회복과 공화제 실현을 목적으로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총사령이 된다. 35세, 1915년 7월 15일 이었다.
대한광복회는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의 4대 지침으로 바탕으로 적극적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7년 겨울에서 1918년 봄까지 수난기에 이종국의 배신으로 전국의 조직망이 발각되어 박상진도 체포되어 3년 6개월의 모진 옥살이 끝에 1921년 8월 11일 38세로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안동대학교 김희곤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그의 독립운동 기간은 10-12년이지만 그의 광복운동에서 박상진의 업적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당시 독립운동의 중요한 양대 줄기였던 구 한말 동학운동의 이념에 뿌리를 둔 유격군 출신들의 무장항쟁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과 국민 계몽운동으로 독립을 추구해야 한다는 쪽과의 갈등을 한데 뭉쳐 똑 같은 조국 광복의 목표에 뭉치도록 하는 중대한 공헌을 한 분이 박상진의사였다.

자주독립과 민주공화국으로 국가 목표를 지향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의 지역갈등 계층간의 갈등,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치유하고 국가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현실 상황과도 상당히 부합되는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 사회 통합의 중요한 정신적 동기를 찾을 수 있는 모델이 아닌가 하는 해석이었다. 대단히 공감이 가는 박상진의사 정신의 해석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1915년 9월 하상면 진장마을에서 고려말의 포은 정몽주의 후손, 鄭久鎔씨의 장남으로 출생, 병영초등, 울산이 배출한 근대사의 위대한 인물 외솔 최현배선생의 사랑방 출입으로 민족의 역사와 글을 배우고 민족혼을 깨우쳤다.
14세에 부산의 제2공립상업학교로 진학, 19세 졸업, 다음해 송태승씨의 딸 송옥자 씨와 결혼,
1935년 21세 때 부산 범일동에 태공 정미소를 설립, 사업계에 뛰어들어 크게 성공하였고,
1943년 부산의 범일동 매축지에 ‘대동연탄’을 설립, 우리 나라 연료계의 전기를 마련하였고 한때 부산 최고의 납세자가 될 만큼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여 ‘석탄왕 정해영’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

국가의 동량을 키우기 위해 동천학사 설립,
부자가 된 정해영은 ‘인재를 키워야 나라가 산다’는 최현배선생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동천장학회’라는 장학기금을 설립하고 서울 성북동에 400평의 대지를 마련하고 50명을 수용할 기숙사 시설을 갖추고 울산 부산 등지에서 성적이 우수하나 가계가 넉넉치못한 학생들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 주었다.
동천학사(東川學舍)는 25년 동안 500여명의 학생들에게 기숙사와 장학금을 제공하였고 여기 출신 장관, 판 검사 국회의원 기업인 학자들이 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정치에 투신
1954년 39세 때, 동족상잔의 6.25가 끝난 후, 국가와 민족을 위한 더 큰 일을 하도록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울산 을구에 출마하여 당당히 3대 국회의원에 당선하였다.
그 이후 연이어 7선이라는 화려하면서도 파란만장한 그의 정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의 정치생활은 자유당 정권의 부정에 끝없이 저항하였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의 초석이 되고자 혼신을 다한 역정의 길이기도 하였다. 동시에 이 나라의 경제발전과 괘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과 뒤이은 10.26이 나고 시련의 ‘서울의 봄’을 거친 후 그의 30여 년에 걸친 정치생활은 마감하였다. 그는 이 나라의 정치사에 크나큰 족적을 남기고 간 도량이 크고 궁량이 많았던 큰 정치인이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정계를 떠난 후, 1951년 원불교에 입교하여 1964년에 백산 법호를 수여 받았던 그는 1991년에는 대호법 법훈을 서훈 받았으니 정계를 떠난 후에도 계속 불자로서의 한길을 걸으며 원불교에 더욱 정진하며 경전을 쓰고 대수양의 길을 걸었다. 2005년 11월 11일 열반에 들었으니 실로 북구가 낳은 근대의 큰 인물의 귀천(歸天)이었다.

  1945년 5월 1일 강동, 신명리 출생, 세계적인 옥수수 육종학자, 노벨상 추천을 4번 받은 과학자,
울산농고, 경북대 농학과, 고려대학원, 하와이대, 일리노이대, 육종학 박사, 현재 울산공고의 역사관에는 그의 개인 코너가 있다.
세계적인 과학자, 교육자, 17년간 아프리카에 머물면서 토양에 맞는 옥수수의 개발과 옥수수에 기생하는 식물을 퇴치하는 업적을 쌓았다. 옥수수의 생산량의 증가로 아프리카의 기근을 해결함으로서 두 번이나 대추장에 추대되었다.
아프리카에서 대추장에 추대되는 것은 대통령보다 더한 최고의 명예임, 노벨 평화상, 생리학상에 4차례나 추천 된 것은 그의 과학적 업적과 아프리카 기근의 해결에 기여한 그의 공로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그의 공적을 과소 평가하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너무나 유감 된 일이다.

현재는 북한의 기근을 해결하고자 경북대학교 연구 실습농장에서 북한에 맞는 옥수수의 개발에 몰두하고 있으면 이미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하고 수십 톤의 옥수수 종자를 북한에 전달한 바 있다.

김순권 박사는 이 고장이 낳은 위대한 과학자요, 진정한 휴머니스트, 교육자이다. 정말로 한국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과학자이다.
그의 자전적 에세이집 ‘검은 대륙의 옥수수 추장’이 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김박사의 좌우명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돈을 위해서인가? 권력을 위해서 인가? 명예을 얻기 위해서인가? 모두 아니다. 사랑을 위해서이다. 받기 위한 사랑이 아니고 주기 위한 ’사랑‘이다. 라고 교훈을 주고있다.

그의 제자들에게 주는 그의 교훈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그 목표에 목숨을 걸고 부딪쳐 가라,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 그것이 명예일 것이다. 단 세계 제일이 되는 것보다는 세계 제일의 성취를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야말로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사는 삶이 진정으로 승리하는 삶이다.
위대한 교육자다운 그의 소신은 수많은 제자들을 감동시키고 있으며 그는 진정한 교육자로서 이 고장의 긍지를 배가한 현존 인물이다.